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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드 소마>(20하나9)장평
    카테고리 없음 2020. 3. 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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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있는 아이 스타의<미드 소마>은 그의 두번째 작품이지만, 그렇게 얕은 소산에서 열린 영화가 아니다. 이는 물론 그가 이전에 단편영화 몇 편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중고 신인으로서의 노련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알리 아기스타라는 감독의 영화가 우리가 아는 것에서 완전히 뭔가를 지적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장르영화라면 장르영화, 예술영화라면 예술영화에도 속할 수 있는 이 범주에서 우리는 그를 표현하는 단어로 컬트라는 문장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 컬트라는 단어가 소수의 팬들에게 발굴되어 열광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컬트라는 꼬리표를 그에게 붙이는 것이 미안해진다. 왜냐하면 아주 명백하게 우리가 생각하는 컬트의 범주는 그다지 긍정적인 것에만 걸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아는 컬트는 작품성 말고도 대중성이 그리 뛰어난 무언가는 아니다. 그러나 대중성이 작품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대중성이 상대적으로 없는 컬트를 주류에서 벗어난 것, 일종의 하위문화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앨리 애기스터의 영화에 대해 그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컬트라는 장르가 하위문화를 대표하는가. 또는우리가그런이분법적인사건에서벗어나려면단순히관심과트렌드라는요인의내용이어떤것을주된홍보요인으로쓸수있을까.일본과 인터넷 등에서 이른바 하위 문화를 앗사 문화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주류 밖에 속할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주로 소비하는 하위 문화가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차보하기 때문이다. 글로 보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를 이 현상은 이들이 이 내용으로 삼는 하위문화라는 것이 소수에게만 받아들여지는 코드가 아니라 소수에게만 유통되는 코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간단히 이 내용이 소수에게만 유통됐을 뿐 소수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에서 소수 문화 소비자들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단지 집단의 국소적인 공간을 따랐을 뿐 에도 그런 공간 속의 문화를 즐기는 것 자체가 괜찮음을 히치적이고 컬트적인 사람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 보면 홍대 인디 뮤지션이 영원히 무명으로 남아야 괜찮겠지만 알고 있는 나만의 작은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지지하는 뮤지션의 성공을 기원하지 않는 왜곡된 팬심이 이에 해당되겠지만, 인터넷 문화 경향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렇게 국소적으로만 포진했던 인터넷 문화가 양지에서도 트렌드를 지울 때 그것을 누리던 사용자들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라는 점이다."인싸들이 또 자기들 것을 빼앗았다."라고 그들이 농담 삼아 탄식할 것이다. 이 글은 진지하게 쓰이기보다는 유머에 가까운 성격이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언의 기저에 괜찮음들이 소유한 문화라는 유치하고 컬트적인 무언가라는 인식이 깔려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인터넷 문화를 땜질하는 것으로 남기려는 공간의 인식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중대한 사안은 인사와 아사라는 두 분류가 공간의 용법으로 확대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인사와 아사라는 단어가 인사이더(insider)와 주변인(Outsider)이라는 두 가지 용례에서 파생된 것을 감안하면 인터넷 문화를 괜찮은 것으로 남기려는 폐쇄적인 개취는 어떤 면에서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의 운동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것이다. 다시 이 내용으로 언더그라운드라는 공간에는 이미 주변인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소속자들에게 그 본질은 주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해냈다'는 소속감은 얼핏 보면 チョン이 내용으로 이상한 내용이다. 앗사라는 운동장이 주류가 아니어서 점조직 형태로 포진하면서도 수면 아래에는 점조직 형태로 연결된 형태를 띤다. 앗사의 문화가 현실보다 인터넷에서 더 활발한 소통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의 연결 방법이 인터넷 문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은밀한 일이지만 친숙하다는 앗사라는 문화적 방식 자체는 일루미나티와 같은 현실의 몇몇 단체에서도 색다르게 관측된다. 이곳 서방점은 일루미나티가 아니라 몇몇 단체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우리의 기준이다. 점조직에 포진해 있는 개인이 일의 이상향을 향해 가는 모습은, 그것이 물 위에서 할 수 있을 때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지만, 물 아래에서 계속 진행하면 이 내용은 바뀐다. 지하 것이 그라운드로 생각된다 해당 공간에 대 칠로 사람들은 공포와 호기심 2개 중 일의 느낌을 느끼고 그 과정에는 일루미나티다는 음모론과 "인사들의 아ー사 문화 절도"라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해당 문화를 누리던 원거주민은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데, 현실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과 달리 점조직에 흩어졌다가 다시 응집하기가 쉽다. 예를 들어 단단한 지반에 구멍이 열리고 그 아래 있는 모래 산에서 대지가 가라앉은 때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지반이 아니라 지하의 모래 더미인 것처럼 이 내용이다. ​ 2. ​ 다시 영화로 돌아가고 보면<미드 소마>의 공간은 내부자나 주변의(외부)으로 나뉘어 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친구가 스웨덴으로 떠나는 여행은 표면적으로는 감각 전환이라는 형식을 취하는데, 그 속에는 인류학 조사라는 목적이 있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 남자 떼와 한 여자의 벗기는 각기 다른 그룹에 속하게 된다. 성별로도 나눠지겠지만 남성집단의 주된 목적은 인류학 조사를 위해 가는 것이나 친구 옆에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모드의 내용으로 볼 때 그들은 내부자 그룹에 해당될 것이다. 한편 한 여자 봇 대니 아서(플로렌스 퓨)는 그런 남자들에게서 정신적으로도 거리감이 있는 상태에서, 여기에 영화는 그녀의 모든 소가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런 거리감에 장력을 불어넣는 단일 사슬을 남자 친구들과 엮어 버린다. 그래서 영화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 휴즈(잭 레이너) 그룹 중에서 대니 편들어가는 방법으로 영화의 도입부를 내부자 안으로 들어가려는 외부인 구도로 설정한다.내부로 들어가려는 뭔가보다는 이미 이 내용처럼 주변인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퓨즈와 다니라는 두 그룹이 있지만, 퓨즈와 대니가 스웨덴의 마을 공동체의 중국에 이리베다는 점에서 실제 공간에서 분리가 이루어지는 것도 있으므로 이 내용이다. 이때 이들의 무리 중 연구자 신분으로 마을을 찾은 사람도 있다는 점에서 무리 모드는 단지 방문자일 뿐 조사자라는 신분도 겸하게 된다. 그래서 무리라는 형태로만 보면 하루가 걸리겠지만 역할이라는 분류로 보면 그들에게는 두 개의 공간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 2개의 분류에서도 대니는 소속 지점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좀 전에 대니가 내부자 그룹에 초청을 받고 스웨덴의 공동체 초청을 받을 수 있었듯이, 그녀는 방문자도 조사자도 아닌 내부자 그룹에 따라온 사람이라는 제3의 주변인에게만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초대를 받아갔고 이는 주위 사람이라는 단어가 초대라는 허가가 있을 때만 비로소 안으로 출입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이 내용으로 해준다. 또 스웨덴 여행을 알게 된 휴즈가 다니에게 어쩔 수 없이 여행을 권하는 것도 불청객을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역공동체 입장에서 대니는 예상치 못한 고객인 셈이다. 이런 내용은 대니가 영화 전반에 소속되지 않은 인물로 영화의 주인공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상태를 따지자면 대니는 세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지점 어딘가에 놓여 있다. 남자 친구와는 이별을 앞두고 있고 소가족은 내 곁을 떠나 있어 이 두 내용 중 대니가 어떤 것과 연결되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대니의 퓨즈 그룹 이외의 인간 관계는 초반에 짧은 통화를 하는 여자 친구 한명뿐이다. 이 내용이라면 이 영화에서 대니의 정체성은 뚜렷하지 않거나 불안정해 보이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대니의 시선으로 진행되지만 정반대편에서 휴즈의 시선으로 대니를 바라보는 형식이었다.우리는 대니라는 사람이 정이 내용으로 실존했는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니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할 만한 연결고리가 영화 초반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것이 대니가 휴즈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고, 스웨덴의 마을 공동체 안에서 대니와 휴즈 커플이 점점 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는 도입부에서 제시하던 혼란스러운 커플의 마지막 느낌을 공동체라는 에둘러 종언을 선고한다. 마을공동체라는 우회지를 통해 대니는 휴즈와의 안전한 이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이미 영화 전반에 존재했던 혼란은 사라진 것 같다.​ 3. ​ 영화에서 신성한 장소에 언급되는 삼각형의 노란 건물이 어딘지 모르게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부각하는 것이라면, 아니 그것이 마치 일루미나티의 은밀한 상징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코르 토적 요소를 강조하는 데 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루미나티라는 것이 실체라기보다는 이름 하여 너를 향한 상징에 더 가까운 상황에서 음모론이라는 비현실적인 현실의 요소에 대해 우리가 풀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본래도 그렇지만 점조직으로 알려진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론이 사실이라기보다는 일의 유머의 소재에 더 가깝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무렵에도 그것은 점조직의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예를 들어 언더그라운드에 있던 것은 그라운드에 올라서도 그 형질이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론이 있었던 것이 언더그라운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일미타니 하면 비밀결사라는 내용이 여전히 떠오르지만 아무도 비밀로 생각하지 않는 이 상태를 그라운드가 된 언더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미드소마>가 자신만의 화법을 완성해 가는 방식도 그것과 색다르다. 영화 속에 균등한 법칙을 지정해 놓고 거기에 관객을 이끄는 방식을 택하는 몇몇 영화에서는 세계의 강한 왜곡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관찰된다. 설득력을 주기보다는 현혹되거나 강마스크할 것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자기장의 영향 속에서 우리는 스웨덴의 마을공동체라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현실 측면에서도 영화 밖에서 알던 것을 버리고 완전히 이질적이고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위 사람의 신분으로 내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옮긴 자리에서 여전히 주위 사람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거기에 제대로 동화되지 못한다는 사실, 해당 공동체에서 다시 나올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화관에 관객으로 왔다는 점이 그곳을 여전히 언더그라운드로 남게 된다.어떤 광경이 전개되든 간에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납득하고 만다. <미드소마>의 공간이 우리가 사는 곳과 살지 않는 곳을 올바르게 분리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자유 또는 방종이 될 수 있는 책들이 다감의 유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것만큼 그들에게 여행이라는 행위 또한 여행을 보는 행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는 영화 속에서 마을을 오가는 간격이 타이더 머신처럼 묘사되는 것이 환각 약물 때문이라는 점에서도 영화라는 매체가 무엇을 보여주는지에 대한 은유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니가 풀밭에 누워 잠을 깨자 어느새 마을에 와 있다. 예를 들면 외계에서 내계를 향해중간 과정이 생략된 셈인데, 이는 공간의 전환에서 중간 지대가 없음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간이 정보를 전하는 데 세상국과 괜찮다는 2가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다시 말해 신뢰와 의심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느끼는 대니와 퓨즈 커플로부터 대니가 휴즈에게 보내는 신뢰는 휴즈가 대니에게 보내는 불신과 접합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이 스웨덴 마을 공동체라는 공간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눈을 감고 눈을 떠도전혀 낯선 이곳은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면 그런 비현실을 횡단함으로써 그들은 이미 현실에 대한 의무와 잘못을 뒤로 했다는 내용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미 한 번의 역전을 겪은 이 세상에서는 언더그라운드가 그라운드로 자리 잡았기에 그라운드에 대한 의무는 바로 현실에 대한 의무와 잘못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을공동체의 미드소마 의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마을 절벽에서 72세를 넘긴 노인이 떨어지는 의식이 할 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두 남성은(비록 대장부의 금기에 대한 대가로)영화 속에서 제거되고, 절차에는 차이가 있지만, 종국에 단 한명의 생존자로 남은 것은 내부에도 주변에도 자리하지 않았다 대니이다. ​ 4. ​ 다니에는 마을 공동체가 대니의 전부라고 보아도 되는데 반대로 퓨즈는 이 영화 속이 전부는 아니다. 그에게는 계속되어야 할 학업이 있고 여자 친구 이외의 여자가 있으며 그것이 해피엔딩이든 배드엔딩이든 열린 세상을 향한 열린 정의 내용, 결국 추구할 의향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끼어든 문제가 완전히 길어진 만큼 나올 때도 문제의 순간을 거쳐야 한다는 불문율을 지키려 할 것이다. 넓은 범주에서 보면 그런 분리와 순간 판단은 죽은 노인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내리치는 절애의식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고, 이 내용이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노인의 이름을 따서 새 아이로 지음으로써 환생이라는 일의 고리가 성립된다고 이 내용인데, 그 중간의 인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노인이 죽고 훗날 아이가 태어날 때 노인의 이름을 지어줬더니 그 사이의 공백에는 노인이란 영혼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이는 대니와 휴즈가 마주한 헤어진 것도 아닌 이상한 상황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니의 시선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영화의 마지막이 대니의 시선으로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는 내용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자체가 문제와 문제 사이에 위치한 믿을 수 없는 미싱 링크인 셈이다.작중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전공인 인류학은 해당 풍습이 열리는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방식에서 중심적인 자료 수집이 열리는 학문이기도 하다. 공간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때 공간 안으로 진입이라는 내용은 공간 안팎을 분리하는 기준이 뭐냐는 물음을 낳기도 할 것이다. 어느 선을 넘어서면 내부자의 공간으로 진입하는가, 또는 어느 선 밖에 있으면 주변사람만 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은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형성한 공간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인류학에 대한 시선은 우리와 다른 무언가,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접근했고 어떤 면에서는 호의라기보다는 불쾌한 쪽의 경이로움에 호도되는 경향도 있었다. 간단히 이 내용으로 인류학의 연구대상은 인간을 학문으로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열광하는 특정범위를 발굴하는 형태로 컬트화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컬트의 대상이 굳이 하위 문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를 보면 밖으로 들어간 안쪽 사람들이 밖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주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사안이지만 안팎이라는 두 세계가 인사와 아사라는 두 용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바깥 세계에서는 마을 공동체가 다소 이질적인 문화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이들이 마을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이다. 그리고 이 주변 사람들은 도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끝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벤야민식 방랑자, 빔밴더스의 독일과 짐 잠쉬의 미쿡이 다소 생소한 즐거운 장소인 이유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휴즈와 휴즈의 벗는 마을 공동체를 바탕으로 논문을 쓰는 것을 놓고 혼선을 빚는데, 정이용 결국 우리에게 중요했던 사실은 논문이라는 실적적으로도 절도되지 않은 마을 공동체의 운명과 시련에 관한 주객전도 그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관심 있는 단상이었다고 이 내용을 쓸 수 있지 않을까.이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신들의 깊은 욕망과 닮은 구석이 많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의 금기와 서열에 관한 선이 주로 불쾌감을 느끼게 했지만, 후기작으로 접어들면서 불쾌의 성질이 희망 혹은 희열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미드소마에서의 대니가 겪는 느낌이 그런 종류의 오르가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 내용이다. 여기서 지적이고, 오르가슴은 순간적으로 의식이 끊긴다는 점에서 죽음과 오르가슴이 있지만 죽음과 달리 그 후의 예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분명 같지는 않다. 이 대목에서 이 영화는 대니가 오르가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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